짐 홀트 지음
노태북 옮김
소소의책
p.427 -
우리가 의무의 부름 이상의 일을 한다고 가정하자. 비록 어떤 직접적인 선을 달성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우리가 하는 이타적 행동의 더 먼 결과도 그러할지 알 길이 없다. 우리가 아는 바라곤 행동의 결과가 우리 의지의 범위를 훌쩍 뛰어넘어 먼 미래까지 이어지리라는 것뿐이다. 원인과 결과의 우발적이고 카오스적 성질 덕분에 악과 선의 균형은 아무렇게나 걸어가기와 비슷하다. 매 단계마다 예상치 못한 뒤집힘이 발생한다는 말이다. (클라라 히틀러와 알로이스 히틀러가 낳은 세 명의 아기가 비극적으로 병들어 죽은 후 그들의 네 번째 아기를 성공적으로 분만시킨 의사의 사례를 생각해보자.) 우리의 행동이 먼 미래에 미칠 결과는 알 수 없기에, 영국의 철학자 조지 에드워드 무어(George Edward Moore)는 자신의 책 『윤리학 원리(Principia Ethica)』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 행동이 다른 행동보다 더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기에 충분한 이유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무어의 결론은 공교롭게도 버네사 벨과 블룸즈버리 클럽에 힘을 실어주었는데, 이들은 무어를 현자로 숭배했다. 그의 영향을 받아서 블룸즈버리 클럽 회원들은 자아의 미덕이 자선과 자기희생의 낡은 빅토리아 시대 미덕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물론 블룸즈버리 클럽을 벗어나면, 굉장한 선을 행하는 비범한 상황들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최종 해결(Final Solution, 나치의 유대인 절멸 계획 및 그 진행 과정) 동안 자기 목숨을 걸고서 유대인을 도운 ‘선한 독일인들’이나 베트남 전쟁 중에 발생한 미군의 미라이 학살에서 비무장 민간인들을 사살하는 대신에 소총을 내렸던 캘리 중위 소대의 유일한 병사를 생각해보라. 그런 극단적 상황에서 어떻게 선을 행할 수 있을까? 능력이 분명 도움이 될 수 있다. 유대인 구조를 도운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와 라울 발렌베리(Raoul Wallenberg), 그리고 국제 원조 전문가 프레드 커니(Fred Cuny)가 그런 경우다. 하지만 꼭 능력이 필요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선한 의지만으로 충분할까? 선한 의자와 더불어 쉽게 정의하기 어려운 다른 어떤 기질, 우리가 배짱 또는 강단이라고 칭송하는 기질이 결합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기질이 뭐든지 간데, 대다수의 선하게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크나큰 악이 행해질 때 그들은 묵묵히 따르는 공범이 되고 만다. 물론 보통의 상황인 경우에는 옥스팜에 기부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조차도 선을 행하려는 의지와 실제로 행하는 선 사이에는 고정된 비율이 존재하지 않는다. 과부에게 주는 십시일반 성금은 참된 자선의 마음에서 나온 것인데도, 인정 없는 자본가들이 자선단체에 생색내기용으로 내는 수백만 달러와 비교하면 하찮다.
따라서 예외적인 선행에는 늘 특별한 자격이 필요한 듯하다. 비범한 수완이나, 아니면 도덕적 영웅이라야 가능한 대단한 용기와 더불어 극단적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태도 같은 것이 필요하다. 만약 이 두 가지가 모두 없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제대로 활약할 수 없을 것이다. 알고 보니 성인은 기회야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오직 행운아인 소수에게만 제대로 실현되는 업종들 중 하나인 셈이다.
필요한 기술적·조직적 능력뿐만 아니라 위대한 이타적 업적을 달성하려면 뛰어난 창의성도 필요한 것 같다. 전쟁 부상자들을 돌보는 데 평생을 바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엄청난 선을 행했다(하지만 그녀의 개혁은 전쟁의 인명 손실을 줄임으로써 훗날 전쟁이 더 일어나기 쉽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은, 스트래치가 20세기 초반 사람들에게 폭로했듯이, 다정하고 자기 헌신적인 자비의 천사가 아니었다. 걸핏하면 화를 내고, 신랄하고, 비아냥거리고, 굽히지 않는 꼬장꼬장한 의지를 지닌 자기중심적 여성이었다. 예술가의 기질이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영국 작가 에블린 워(Evelyn Waugh)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겸손은 예술가에게 유리한 미덕이 아니다. 자부심, 경쟁심, 탐욕, 악의야말로 사람이 자신의 자긍심과 시기심과 탐욕을 충족시키는 어떤 것을 만들 때까지 자신의 작품을 만들고 가다듬고 고치고 파괴하고 다시 만들도록 이끈다. 그러면서 예술가는 너그럽고 선한 사람들보다 세상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 비록 그 과정에서 자신의 영혼을 잃을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바로 예술적 성취의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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