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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학당 이야기/책과 밑줄

by 호학당 2021. 12. 7.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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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리 웨스트 지음

이한음 옮김

김영사

 


 

 

 

p.195-200

루이스 리처드슨은 분쟁의 거듭제곱 법칙 스케일링이 전쟁과 관련된 여러 체계적인 규칙성들의 한 사례라고 보았고, 인간의 폭력성을 설명할 일반 법칙을 찾아내고 싶어 했다. 이론을 개발하려 애쓰다가, 그는 이웃 국가들 간 전쟁 확률이 마주한 국경의 길이에 비례한다는 가설을 세웠다. 자기 이론을 검증하려는 의욕에 불탄 그는 국경의 길이를 어떻게 측정하는지 알아내는 일에 착수했다. ......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프랙털을 발견했다.

자기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그는 국경의 길이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발표된 자료들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났다. 예를 들어,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의 국경 길이는 어떤 자료에는 987킬로미터라고 나와 있는데, 다른 자료에는 1,214킬로미터라고 적혀 있었다.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국경 길이는 380킬로미터라고 나온 자료도 있고 449킬로미터라고 하는 자료도 있었다. 측정 오차가 그렇게 크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 무렵에 측량은 이미 고도로 발달한, 잘 정립되고 정확한 과학이었다. 한 예로, 19세기 말에 에베레스트산의 높이는 오차가 1미터 이내로 측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국경의 길이 측정값이 수백 킬로미터 차이가 난다니, 정말로 기이했다.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리처드슨이 조사하기 전까지, 길이의 길이를 재는 방법론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있었다. 너무나 단순해 보이면 무언가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길이를 어떻게 측정하는지 분석해보자. 당신의 거실 길이를 대강 추정하고 싶다고 하자. 1미터짜리 자를 벽을 따라가면서 죽 댄 다음(직선으로) 몇 번 댔는지 세면 곧바로 추정할 수 있다. 여섯 번 댔는데 좀 남으므로, 당신은 거실의 길이가 대강 6미터라고 결론짓는다. 좀 뒤에 더 정확한 추정값을 얻을 필요가 생겨서, 당신은 좀 더 결이 고운 눈금을 지닌 10센티미터 자를 써서 추정값을 얻는다. 자를 좀 더 꼼꼼하게 대면서 재니, 63번째에 끝에 닿았다. 따라서 길이의 더 정확한 근삿값은 63x10센티미터, 즉 630센티미터 또는 6.3미터다. 얼마나 정확한 답을 알고 싶으냐에 따라, 더 눈금이 세밀한 자를 써가며 이 과정을 되풀이할 수 있다. 밀리미터 수준의 정밀도로 잰다면, 길이가 6.289미터라고 나올 수도 있다.
   
실제로는 대개 자를 옆으로 옮기면서 잇달아 갖다 대는 대신에, 간편하게 긴 줄자나 다른 측정 기구를 써서 이 지루한 과정을 피한다. 그래도 원리는 똑같다. 줄자 같은 측정 기구는 그저 1미터나 10센티미터 같은 표준 길이의 짧은 자를 죽 늘어놓고서 이어붙이 것에 불과하다.
   
어떻게 측정하든, 측정 과정에는 해상도가 높아질수록 측정값이 점점 더 정확한 고정 값에 수렴한다는 가정이 담겨 있다. 그 고정 값이 바로 우리가 방의 길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것을 당신 거실의 객관적인 특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사례에서, 방의 길이는 해상도가 증가함에 따라 6미터에서 6.3미터를 거쳐 6.289미터로 수렴된다. 이렇게 더 정밀하게 잴수록 정확한 길이로 수렴된다는 것은 지극히 명백해 보이며, 사실 수천 년 동안 그 점에 의문을 품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50년 리처드슨이 국경과 해안선의 길이라는 놀라운 수수께끼와 우연히 마주치기 전까지 말이다.
   
이제 이 표준 측정 방식을 써서 이웃한 두 나라의 국경의 길이나 한 나라 해안선의 길이를 잰다고 상상하자. 우선 100킬로미터짜리자를 길이 전체에 걸쳐 죽 갖다 댐으로써 아주 대략적인 추정값을 얻을 수 있다. 이 해상도의 자를 12번 갖다 대었을 때 좀 남는다고 가정하면, 국경의 길이는 대강 1,200킬로미터를 좀 넘는다고 할 수 있다. 좀 더 정확한 측정값을 얻기 위해, 이번에는 10킬로미터 자를 갖다 댄다고 하자. 거실 사례에서 설명한 통상적인 '측정 규칙들'에 따라서 자를 124번 갖다 대니, 1,240킬로미터라는 더 나은 추정값이 나온다. 이제 1킬로미터 자로 해상도를 높이면 더 정확한 추정값을 얻을 수 있다. 자를 1,243번 갖다 댔으니, 추정값은 1,243킬로미터가 된다. 점점 더 해상도를 높이면서 계속 재면, 필요한 수준의 정확한 값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리처드슨은 세밀한 지도에 캘리퍼스로 이 표준 반복 측정 방식을 적용했을 때,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대단히 놀랐다. 실제로 그가 발견한 것은 해상도가 높아질수록, 따라서 예상 정확도가 더 높아질수록, 국경선의 길이가 어떤 특정한 값이 수렴되기보다는 오히려 더 커진다는 사실이었다! 거실의 길이와 달리, 국경과 해안선의 길이는 어떤 고정된 값에 수렴하기보다는 계속해서 점점 더 길어진다. 이는 수천 년 동안 암묵적으로 가정했던 측정의 기본 법칙에 어긋나는 현상이었다. 리처드슨이 마찬가지로 놀랐던 또 한 가지는 이 길이 증가가 체계적인 양상을 띤다는 점이었다. 다양한 국경과 해안선의 길이와 측정에 쓴 해상도를 각각 로그 눈금으로 표시하자. 우리가 앞서 여러 사례들에서 보았던 바로 그 거듭제곱 법칙 스케일링을 시사하는 직선이 나타났다. 너무나 기이한 결과였다. 통념과 정반대로, 이런 길이들은 측정할 때 쓴 단위의 규모에 따라 달라지는 듯했고, 따라서 길이는 측정되는 대상의 객관적인 특성이 아니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잠시 생각하면, 무슨 일인지 금방 깨달을 것이다. 거실과 달리, 대부분의 국경과 해안선은 직선이 아니다. 오히려 정치, 문화, 역사를 통해 '임의로' 정해지거나 국지적 지형에 따라 정해지는 구불구불한 선이다. 측량을 할 때 사실상 그렇게 하듯이, 해안선이나 국경의 두 지점 사이에 길이 100킬로미터의 곧은 자를 갖다 댄다면,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구불구불함과 울퉁불퉁함을 빠뜨리게 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10킬로미터 곧은 자를 쓴다면, 그보다 큰 규모에서는 빠뜨렸던 구불구불하고 울퉁불퉁한 지점들까지 더 잘 재게 될 것이다. 해상도를 더 높이면, 그런 지점들을 더 상세히 측정할 수 있고, 구불구불한 선들을 따라가며 재니 더 거친 100킬로미터 규모에서 얻은 값보다 추정값이 더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 마찬가지로 10킬로미터 자도 10킬로미터보다 더 작은 규모의 구불거림과 울퉁불퉁함은 빠뜨릴 것이다. 해상도를 1킬로미터로 높이면 그런 구간들도 포함될 것이고, 길이는 더 늘어난다. 따라서 리처드슨이 조사한, 구불구불하고 울퉁불퉁한 곳이 많은 국경선과 해안선 같은 선들에서는 해상도를 높일수록 길이 측정값이 계속 늘어난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증가가 단순한 거듭제곱 법칙을 따르므로, 이런 경계선들은 사실 자기 유사성을 띤 프랙털이다. 다시 말해, 한 규모에서 울퉁불퉁하고 구불구불한 부위들은 다른 규모에서 울퉁불퉁하고 구불구불한 부위들의 규모 증감판이다. 따라서 개울둑의 침식된 부위가 큰 강의 둑에 난 침식된 부위의 규모 축소판이거나 더 나아가 그랜드캐니언의 아주 작은 판본처럼 보인다는 데 놀랐을 때, 당신이 본 것은 착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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