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구치 슈 지음
김윤경 옮김
인플루엔셜
p.210 - 213
17세기 철학자인 스피노자를 여기서 소개하는 이유는 오늘날 그의 주장이 새삼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변화가 극심한 시대에 살고 있으며, 우리를 둘러싼 일들과 우리 개인의 관계는 항상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어간다. 이런 시대에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세간의 보편적인 판단에 의지할 수는 없다.
우리가 현자로서 인생을 만족스럽게 누리려면 결국 다양한 일을 시도해보면서 어떤 일이 자신의 코나투스(conatus)를 높이는지, 또는 훼손하는지를 경험으로 알아나가야 한다. 이런 '시도'는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핵심 요소다. 우리의 코나투스는 저마다 특별하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자신의 코나투스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살펴보고 자신에게 맞는 '좋고 나쁨'의 판단 기준을 갖추어나가야 한다고 스피노자는 설파했다.
이에 대치되는 개념이 겉모습이나 지위에 따라 어떤 사람의 좋고 나쁨을 단정 짓는 사고방식이다. 본래의 자신으로 있으려는 힘인 코나투스에 대비되는, 겉모습이나 지위 등의 형상을 그리스어로 에이도스(eidos)라고 한다.
예를 들면, 성별도 하나의 에이도스다. 하지만 당신은 여자니까 이것을 좋아할 거라든지, 당신은 남자니까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편견은 코나투스를 무시한 강요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강요받은 사고가 실제로 그 사람의 코나투스를 높여주는 좋은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외모나 지위라는 에이도스를 근거로 '나는 이러이러 해야 한다', '나는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렇게 에이도스에 근거한 자기인식은 종종 코나투스를 훼손해서 그 사람이 자신답게 살아갈 힘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오늘날처럼 변화가 극심하고 '좋고 나쁨'에 대한 관념이 폭력적으로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더욱더 자신의 코나투스를 높여줄 일을 다양하게 시도해야 한다.
무엇이 자신의 코나투스를 높일지는 결국 시도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결론이었다. 이런 결론을 커리어 관련 연구들이 뒷받침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스탠퍼드대학교의 교육학·심리학 교수 존 크럼볼츠(John D. Krumboltz)의 연구다.
성공한 사람은 어떻게 커리어 전략을 짜고 어떻게 실행했을까? 존 크럼볼츠는 이것에 관해 최초로 본격적인 연구를 실시했다. 그는 미국의 사업가와 직장인 수백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성공한 사람들의 커리어 형성에 계기가 되었던 일의 약 80퍼센트가 '우연'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렇다고 그들이 커리어를 형성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당초의 계획이 틀어지면서 다양한 우연이 겹쳐서 결과적으로는 '성공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크럼볼츠는 이 조사 결과를 토대로 커리어는 우발적으로 생성되는 만큼 중장기적 목표를 설정하는 방식은 오히려 위험하며, '좋은 우연'을 끌어당기기 위한 계획과 습관에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계획된 우발성 이론(Planned Happenstance Theory)'으로 정리했다. 크럼볼츠에 따르면 우리의 커리어는 용의주도하게 계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우발적인 일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다면 커리어 형성으로 이어질 만한 '좋은 우연'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어떤 요건이 필요할까? 우선 계획된 우발성 이론의 제창자인 크럼볼츠의 주장을 열거해보겠다.
- 호기심: 자신의 전문 분야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로 시야를 넓히면 커리어를 위한 기회가 증가한다.
- 끈기: 처음에는 잘 되지 않더라도 끈기 있게 지속하면 우연한 일이나 만남이 생겨 새로운 국면을 맞을 가능성이 커진다.
- 유연성: 상황은 항상 변화한다. 한번 결정한 일이라도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해야 기회를 붙잡을 수 있다.
- 위험 감수: 모르는 일에 도전하면 실패나 차질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적극적으로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크럼볼츠의 주장을 스피노자의 사상과 겹쳐서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에이도스에 따라 좋아하는 것만 고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에든 자신의 코나투스를 높일 기회가 잠재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열고 기회를 수용하는 것이다. 이런 사고야말로 특히 변화가 심하고 직업의 종류가 계속 바뀌어가는 현대에 요구되는 뉴타입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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